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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7 탕자시대 -맏아들- (눅 15:25-32)
작성일 :  2021-07-06 14:18
이름 :  admin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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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버지 집은 즐거움에 가득 찼습니다. 이유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식, 잃었다가 다시 얻은 자식을 맞이하는 기쁨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활의 환희가 넘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살찐 소를 잡고 풍류 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벌어지고 아버지 아들과 종들과 이웃이 즐거움의 잔치 속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잃어버린 죄인을 찾고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온갖 구원운동의 만족을 설명함에 틀림없습니다(눅15:7).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 새로운 탕자시대의 태동

1. 그것은맏아들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여기 맏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시 종교적 특권을 가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가리킵니다. 맏아들은 어떤 자인가? 밭에 있던 자입니다. 그는 환희의 잔치가 멀어지던 시간에 집에 있지 않고 밭에 있었습니다. 여기의 은 영적으로 당시 저들의 외적 종교 활동을 말합니다. 참으로 저들은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도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던 자들입니다(23:23). 그들은 회칠한 무덤 작업으로 분주했으나 속에는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자들입니다(23:25-26). 참으로 저들은맏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부터 형언키 어려운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새로운 탕자시대의 태동한 상황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이 아닌 본방 유대인맏아들된 자들, 이미 기존하는 신자들로 일어난, 말하자면먼저 된 자들로부터 멀어진 비극입니다. 실상 아버지와 상거가 먼 자였습니다. 그는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 대(26)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풍류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몰랐습니다. 그 잔칫집이 바로 자기 집입니다. 그는 당연히 집에 뛰어 들어가 아버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신분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한 종을 불러야만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직접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실상 집안의 탕자였습니다. 2. 자기 의를 주장함에 생겨났습니다(29). 자기의 의, ➀「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다는 이것입니다. 여러 해란 말속에는 아버지를 섬김에 있어서 감심에서가 아니고 의무적이고 부득이함의 내용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를 아무리 오래 섬겼다 해도 그것이 그의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본래적인 것입니다. 이런 유의 탕자는 지상교회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조를 자랑하고 직분의 권위만을 앞세우며 그 신앙과 직분의 요구하는 내용은 생각하지 못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의를 주장합니다. ➁「명을 어김이 없거늘하는 의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명을 어긴 죄인들입니다(3:11). 삯이 의의 댓가인 것으로 내세웠습니다. 내게는 염소새끼도 주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그의 고귀한 신분과 지위와 자격을 저렇게도 염소새끼 한 마리로 흥정하고 있습니다. 마치 에서가 장자의 고귀한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흥정하는 우매함과 같습니다.(25:34) 아버지 집의 아들은 삯을 위하여 일하지 않습니다. 삯을 위해 일함은 삯군, 품군들의 소망일뿐입니다.

. 새로운 탕자시대의 도전

 1. 그것은부활에 대한 도전입니다. 분노의 도전입니다.저가 노하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의 성냄은 이 잔치집의 분위기에 맞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둘째 아들로 생겨난 은혜와 축복의 기쁨을 오히려 맏아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였습니다. 이 맏아들의 성냄에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2. 집 밖에서의 도전입니다.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집 밖에서 종을 불러 그 잔치하는 사연을 물어보고는 그만 들어가기를 싫어했습니다. 은혜로운 장면에 들어가기를 싫어했습니다. 축복의 집에, 풍류의 집에, 아버지가 있는 집에, 살아온 동생이 있는 집에, 부활이 있는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했습니다. 집 밖에서의 도전!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탕자시대의 착란들입니다. 3. 그는 온갖 생명의 가능성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와, 탕자의 돌아옴에 다시 맞아들일 가능성에 불평하고 도전했습니다. 그는 동생의 생명의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물론 동생의 죄는 죽어 마땅할 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회개하고 돌아온 이상 그 동생은 모든 절망적 파괴에서 회복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맏아들에 대한 가능성조차 버렸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이고 그 집의 모든 것이 자기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풍요스런 자신의 가능을 망각한 처신을 했습니다. 정말 주어진 축복에 대한 무지한 자입니다.

성도여러분!

마음에 없는 순종과, 율법에 대한 사랑없는 충성은 결국 새로운 형태의 탕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떠나는 집안에 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영혼운동에 아무런 감격이나 보람의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잃었던 영혼, 죽었던 영혼이 다시 구원을 얻는 이 신비로운 생명의 가능성 앞에 아무런 즐거움을 나눌 줄 모릅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능 앞에 무서운 역리적 도전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시야에는 죄악의 황혼이 짙어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오라고 거룩한 손을 들고 아버지는 기다리십니다. 남보다 먼저 믿은 우리들이, 아버지의 구원운동에 즐거워 헌신합시다. 교회의 위기는 역사적으로 살펴 보건데 외부의 세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외적 탄압은 오히려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의 위기는 내부의 부패에 있어 왔습니다. 말하자면 맏아들의 도전에 그 위기가 있었습니다. 먼저 된 자 우리들은 삼가 조심하여 자신을 돌아보아 육신의 사욕(邪慾)을 쳐 복종시키며 스스로 구원을 이루면서 또한 남에게도 귀한 본을 받게 하는 이중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은총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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